산지골이야기산지골지기의 소소한 일상이야기

기막힌 포도와 여름

Author
Jinkook Ryu
Date
2017-07-06 05:27
Views
2895
007/8/11 (7:22) ....hit >>  10968
07grape.jpg
지리한 장마에 이어 불볕 더위을 견디며 사는 요즘은
화두가 없었습니다.
실은 멍한 채, 맹한 모습으로 또는
무념무상으로 학교와 집을 오가다,
오늘, 문득 세월이 2007년이란 숲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.
밤새 내렸고, 아직도 내리는 비가,
잠시 더위를 식히고,
더위에 멍해진 우릴
조금은 일으켜 세웁니다.

여름 숲으로 들어올수록
봄의 초록에 대한 환희는 사라져가고,
초여름 화려한 꽃들에 대한 환호성도 잊혀져갑니다.
그렇다고 봄 같은 초록이 주변에 전혀 없는 것도 아니고,
화사한 꽃들이 전부 자취를 감춘 것도 아닌데,.......
넘치니 오히려 그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며 지냅니다.

반성하는 의미로 오늘은 우산을 쓰고 우리 집 주변 자연을 의식적으로
돌아보았습니다.  깊숙이 들어온 이 여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
이런 계절을 또 만나려면 한해를 기다려야 할 거란 조금은 절박한 심정으로....
요런 저런 모양의 해바라기와 다알리아 그리고 나리 꽃들이 집 주변에 지천으로 있고,
연한 흰빛에서부터 진한 자줏빛에 이르는 가지각색의 나팔꽃들이 칡 나무가 산을 점령해 나가듯,
집주변을 점령하고 있네요.
한줄기 바람에 어디선가 칡꽃 향이 날아옵니다.
무엇보다 이사 온 해 심은 배롱나무가 드디어 살아났는지, 분홍빛 꽃이 줄기 끝마다 피어있습니다. 그간 병이 들어 시들시들해 남편이 아예 밑둥 째 잘라내 버린 나무였는데, 고 짧게 남은 기둥에서 줄기가 나와 꽃까지 피우니 신기합니다.
그런데, 그 이파리가 무성하던 상사화는 단 한줄기 꽃대만이 올라와 있습니다.
이상해서 남편에게 물어보니,

“뭔 늦게 올아 오는 사연이 있겠지! ” 하며 너스레를 떱니다.

그럼 꽃대가 더 올라 온다는 말인데 올라올지 안 올라올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만,
어쩌거나, ‘이 세상 모든 것엔 사연 없는 존재는 없다.’는 말이 떠올랐습니다.

또 사람 키만한 해바라기에 나팔이 칭칭 감고 올라가 남편 말처럼 ‘나바라기‘꽃을 피웠습니다.
정수리엔 노란 해바라기 꽃이 몸둥이엔 하얀빛 나팔꽃이 주렁주렁.

별 일없이 지나가는 여름이지만,
모든 존재를 하나하나 들여다보니
이야기 거리가 있네요.
아! 특히 빼먹으면 안 되는 것 하나!  우리 밭에 포도가 주렁주렁(?) 열려 감칠맛 나는 포도를 몇 송이 째 따먹고 있다는 것!  우리가 이 포도를 먹을 수 있게 되기까지는 기막힌 사연(?)이 있습니다.  남편은 이사 온 해, 그해부터 바로 따 먹을 수 있다는 포도를 거금을 들여 두 그루 사다 심었습니다. 근데 포도는 고사하고 잎까지 모두 우수수 다 떨어져 버리더니,
아예 한그루는 죽었습니다.  매 년 그런 상태로 지나갔는데, 올핸 남편이 큰맘으로 봄부터 포도나무 옆을 지날 때면, 포도 잎에 기생하는 벌레를 한 마리 한 마리 모두 잡았습니다. 저리 벌레들을 한 마리 한 마리 잡는다고 될 일일까 싶었는데, 며칠 전, 제법 큰 포도를 한 송이 턱 안기니, 기가 막히네요.  너무 귀한 포도라 껍질 째 다 먹어야지 했는데, 햇빛을 그대로 보며 익은 거라 껍질은 좀 질겨서 아까워도 못 먹고 가끔씩 씨앗은 그냥 삼키거나 아작아작 깨물어 먹었습니다.  남편은 한 술 더 떠, 아직 덜 익은 퍼런 송이도 얼굴을 한번 찡그리고는 먹습니다.

여름날, 꽃과 풀과 이런저런 나무들 외에 우리 집을 장식하고 있는 것 또 하나!
커다란 고무보트!   마을 앞으로 흐르는 강으로 오후 가장 더운 시간에 가족 모두
내려갑니다.  큰맘 먹고 장만한 고무보트를 가지고.  두 세 시간 수영도 하고, 보트를 타고 물놀이를 하다보면 더위가 가장 기승을 부리는 시간이 훌쩍 흘러갑니다.  온 몸이 젖은 채, 집으로 올라와 저녁거리를 장만하면, 그리 더운 줄도 모릅니다.  이래서 멀리 피서 여행을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가 봅니다.

둘러보다보니, 또 하나!  보이지 않는 존재이지만, 이 여름 숲을 꽉 채우고 있는 것이 있네요.
잠시도 멈추지 않는 풀벌레 소리들! 녹음이 이 여름을 시각적으로 꽉 채우고 있다면,
그들은 소리로 숲을 채우고 있습니다.  지금은 여러모로 보나 꽉 찬 계절!

학교와 집만을 오가며
텅 빈 수수깡처럼 되어가던 마음속에
이 꽉 찬  여름을 조금씩 밀어 넣고 싶습니다.
icon.gif 경용이네
[2007/9/23 (20:6)]
추석입니다. 요새는 어떻게 지내시는지...우리 사는 이야기에 글이 자주 안 올라와서 궁금합니다. 다들 잘 지내시죠? del.gif
icon.gif 산지골
[2007/9/25 (16:35)]
맑고 푸른 추석이네요.  무소식이 희소식. ㅎㅎ 잘 지내고 있습니다.  경용이네도 잘지내지요